AI- 어른이들의 동화. 새시대의 피노키오: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
영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한편의 긴 동화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데이빗은 아이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입니다. 사실 데이빗은 아이 그 자체의 로봇입니다. ‘역할’이라는 인위적인 수식어가 붙기에는 데이빗이 너무 인간스럽습니다. 물론 초기의 데이빗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입니다. 엄마 모니카를 향한 사랑의 표현들은 인간이 하지 않는 방식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영화를 보며 초반에는 굉장한 ‘불쾌한 골짜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모니카의 친아들 마틴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인간화를 겪습니다. 이후 엄마에게 버려진 데이빗은 진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피노키오 속 ‘푸른요정’을 찾아가며 인간의 감정을 점차 갖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 중 데이빗이 ‘로봇축제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장면’과 ‘맨하튼에서 자신이 양산형 로봇임을 깨닫고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하는 장면’을 보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존에 대한 갈망, 동시에 죽음에 대한 갈망은 영화 속 데이빗이 보여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자연에서 자살을 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라고 합니다. 물론 극히 소수의 사례로 자살하는 동물들이 인간의 카메라에 담기긴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삶에 회의를 느껴서 자살하는 것인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통상 경험적으로 ‘자살’은 인간의 전유물로 느껴집니다.
데이빗은 살려달라고 외치며 동물의 생존 본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무기물인 로봇은 하지 않는 것이지요. 나아가 데이빗은 죽음까지 갈망합니다. 자신이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데이빗에게 삶의 무의미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 ego를 탐구하고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 인간이 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모습입니다. 또한 바다 깊은 곳, 푸른 요정의 동상 앞에서 엉겁의 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종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데이빗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일까요? 아쉽게도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빗의 감정과 마음에는 바꿀 수 없는 근본적인 대전제가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니카만을 사랑한다”
데이빗의 모든 감정은 이 대전제로부터 시작되며 모니카의 사랑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대전제를 부여받은 것도 아니며 사명도 소명도 없이 태어납니다. 그냥 태어납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이 세상 모든 물건은 본질, 즉 쓰임과 용도, 목적을 정한 다음에 실존하게 됩니다.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그리고 자연의 동물들만이 실존이 본질에 앞서서 탄생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태어났고 태어났기에 사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행복하게.
이 지점이 데이빗과 인간이 180도 다른 점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불가항력적으로 한 사람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고집해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계속 변화합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코딩되어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모니카를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이는 인간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든 알고리즘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과 데이빗의 감정은 출발도 목적도 다릅니다.
영화가 주는 질문들
1. 감정을 가진 기계를 만들어도 될까
데이빗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모사한 기계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 자체도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관념의 분야라고 여겨진 인간의 생각조차 우리 두뇌 속 뉴런과 뉴런 사이 시냅스의 전기작용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인간과 감정을 느끼는 로봇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로봇은 인간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로봇은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면 인간의 윤리는 사인 간의 영역에서 사람 대 로봇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 동물권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윤리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이유에서도 굳이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만들 필요가 없어보입니다. 우선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만드는 것 보다 다른 형태로 로봇을 만드는 것이 더욱 효율적일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노동현장에서 일할 때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형태로 로봇을 만들어야지 굳이 휴머노이드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나온다면 1차 2차 산업보다는 3차 산업 특히, 영화에서 나온 바와 같이 유사연애 혹은 반려로봇으로 나올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하지만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불러올 사회적 비용과 논의, 파장을 생각해보면 실제 휴머노이드가 우리에게 줄 경제적 효용은 낮습니다. 윤리적 논쟁 등과 같이 새로운 논쟁을 불러 올 것이고 갈등비용을 증가 시켜 사회 전체의 비효율성을 올릴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논리로 봤을 때도 휴머노이드를 만들었을 때의 편익보다 금지시켰을 때의 편익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더해 보겠습니다. 감정을 가진 로봇이 다수를 차지하고 소수의 인간이 이들을 지배하는 구조는 노예제 사회를 연상시킵니다. 로봇이 감정을 가졌다면 분노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차별과 탄압으로 쌓인 다수 로봇의 분노는 반란을 불어올 것이고 이는 인간종의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영화 속에서 200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하고 그 자리에 진화한 로봇들이 대체한 것처럼 말입니다.
2. 모니카는 데이비드를, 데이비드는 모니카를 사랑했을까
저는 모니카도 데이비드를, 데이비드도 모니카를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그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저희 집 강아지가 데이빗과 자꾸 겹쳐보였습니다. 저는 저희 집 강아지를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저는 제 삶의 많은 행복과 이유가 저의 강아지로부터 옵니다. 저는 저의 강아지를 위해서라면 로또 1등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로또보다 더한 미국 파워볼 1등 당첨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또 저희 집 강아지도 저를 너무 사랑합니다. 아마 데이빗과 모니카의 관계도 이런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사람 대 반려로봇의 사랑은 사람 대 반려동물과의 사랑과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4. 로봇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 사회에 어떤 반향을 불러올까
반려로봇, 로봇애인이 나온다면 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파괴될 거 같습니다. 인간은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이 만나 싸우기도 하고 서로 배려해가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시비지심, 수오지심 등의 사단을 배워가며 도덕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봇은 목적을 가진 존재이기에 소유권자인 인간을 위한 행동을 합니다.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인간에게 항상 맞춰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과 사단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들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사회의 도덕질서가 많은 부분 훼손되리라 생각합니다.
'# 사유 > 영화 &&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DP 시즌2 후기: 사실 난 잘 모르겠어 내가 뭐하고 싶은지 (0) | 2023.08.03 |
---|